수퍼마켓 인생
물가 비싼 영국에서 살다 보면
아무래도 레스토랑, 카페는 멀리하고
수퍼마켓과 친해지게 마련이다.

사실 난 수퍼마켓 쇼핑 매니아다.
광활한(!) 대형 수퍼마켓 체인점에 들어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 기대감으로 희열까지 느낄 때가 있다.
혹여라 놓치는 거라도 있을까, 샅샅이 가게를 훑다 보면
쇼핑 시간 평균 2시간 이상.
한국에 있을 때도 상황은 대략 비슷,
한 번은 기록적으로 나온 쇼핑 영수증을 친구가 벽에 붙여놓기까지 했다.
벽 높이의 절반 정도의 길이를 차지한 영수증을 보며 반성 좀 하라나.
대책없는 충동구매를 막아보고자 쇼핑리스트를 만들어 가보기도 하지만
성공률은 대략 0.001%.
그래서 자금난에 쪼들리는 요새는 아예 쇼핑을 안 가는 전략에 돌입했다.


영국은 대형 수퍼마켓 체인이 대부분의 유통을 점령한 탓인지
영국에서는 시장뿐 아니라 빵집, 정육점, 어물전 등등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수퍼에 가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품, 농산물과 빵, 고기, 생선 등의 먹거리는 기본이고
주방용품, 가전제품에 의류와 책, CD까지, 사실상 없는 게 없다.
Asda, Sainsbury, Tesco, Waitrose 등 유명한 수퍼마켓 체인이 어디에나 널려있고,
한 가게 안에서도 가격대가 다양한 상품들을 진열해놓아 선택의 폭도 넓은 편.

사실 영국에서 수퍼마켓 물가만 놓고 보면
정말 한국보다도 저렴하게 최저생계비로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취향이란 게 참 얄궂은 거라,
고급취향으로의 상승은 쉬워도
저질로 다시 내려가기는 비참하다.

홍차를 놓고 보자.
난 영국에 오기 전에는 홍차 뿐 아니라 대부분의 차종류를 안 마시던 인간이었다.
여하간 영국이라니까 그래, 한 번 제대로 영국적으로 살아보자 하며 도전하기 시작한 게 홍차.
처음에는 동네 수퍼에서 두 번째로 싼 홍차(너무 싸면 웬지 의심스러운 게 소비자의 마음)를
1파운드도 안 되는 돈을 주고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 같은 수퍼 안에서도 약간씩 좀 더 비싼 홍차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그때는 맛의 차이는 잘 못 느끼겠더군.
그러다 한국에 잠깐 들릴 있어
위타드라는 유명한 홍차 전문점에서 선물용 홍차를 잔뜩 사게 되었다.
그중 하나 남는 걸 돌아와서 마시는데 웬걸, 이건 맛이 월등히 낫잖아!
그 이후로는 다시 수퍼마켓 홍차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허나, 여전히 티백 인생이던 내게 지인이 질 좋은 잎 홍차를 한 통 놓고 갔다.
그 향과 그 맛이란...ㅠ.ㅠ
요즘에는 포트넘&메이슨이라는 홍차로 유명한 백화점에서 산 아삼 홍차를 마시고 있다.
가난한 학생 신분에 이 웬 사치인고...

비슷한 일이 수퍼마켓 선택에서도 생긴다.
처음 영국에 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Asda를 선호한다.
특히 소위 말하는 '백색 아스다' 물건들(포장을 최소화해 가격을 다운시킨  자체 프로모션 제품)은
정말로 싸서, 한 주에 10파운드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저질상품이라는 낙인을 신경쓰지 않는다 해도
점점 더 가격은 더 나가도 상대적으로 제품의 질이 더 믿을만한 물건들로 이동하다가
급기야는 뭔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겠다는 feel이 오면서
Tesco나 Sainsbury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러다가 수퍼마켓 계의 귀족, Waitrose에라도 들려볼라치면,
이건 가게 공기부터가 다르게 느껴진다.
칙칙한 물류창고에서 백화점 식품점으로 온 기분이랄까?
Waitrose의 물건이 Asda에 비해 평균적으로 1.5배에서 2배 가량 비싼 편인데,
주변 사람들의 경우를 보건대 아무리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져도
Waitrose 가던 사람은 Asda에는 웬만하지 않으면 가지 않으려 한다.
지갑이 가벼워지는 대신 생활의 질은 올라간다고나 할까.

수퍼마켓과 집과 학교가 전부인 단조로운 삶,
까다로운 고급 취향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먹을 건 제대로 된 걸 먹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수퍼마켓은 일종의 절충의 공간이 된다.

그래봤자 1, 2p  사이인데,
그 사이에서 가격이냐 질이냐를 따지면서 심각해지는 게
사실 좀 서글프고 코믹하기도 하지만
그게 인생 아닌가.

 
by haarie | 2006/07/12 04:39 | 2006 diary | 트랙백(2)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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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이오공감의 흔적 at 2006/07/12 11:54

제목 : 2006년 7월 12일 이오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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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Secret Garden at 2006/07/14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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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마켓 인생 호주 수퍼중 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창고형 마트인 ALDI (알디) 이다.. 처음 호주 와서 우연히 들어가보고 그 착한 가격에 그와 두 손 맞잡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알디 주변의 다른 대형 수퍼들은 알디를 의식해서 다른 체인점보다 가격이 더 싸다는 조사결과도 있을 정도다.. ......more

Commented by 박정호 at 2006/07/12 12:07
밴쿠버에 살 때 수퍼마켓에서 재로 사다가 요리하기 귀찮아서 식당 가서 사먹던 기억이 나네요. 그 돈만 모았어도 여행 한번 더 갔을 텐데...ㅜ.ㅜ
Commented by skalsy85 at 2006/07/12 14:10
네..확실히 공감가는군요..^^;
일단 마트 장보러 가는걸 일반 사람 놀이공원 가듯 인간이라.=_=
사람 입이라는게 간사해서 taste 가 한번 오르게되면. 정말 왠만해선 떨어질 수가 없지요..T_T

Tesco 는 홈플러스로. 한국에두 들어와 있던데~
Sainsbury는 내셔널갤러리에서 본 생각이 나요..:)
Commented by kisa at 2006/07/12 14:14
대형 수퍼마켓에가면 저역시 가슴이 두근거린답니다. 왠지 흥분되어서..몇번이나 오늘 마켓이어도 언제나 다른 느낌이 드는걸요. 그래서인지 저도 영수증이 말이 아니랍니다^^;
Commented by antiwhite at 2006/07/12 14:48
저도 영국에 지낼때 슈퍼가는게 일상이었죠...
뭐.. 남자녀석이라 메뉴가 한정되어있어서...
4가지 정도 메뉴로...6개월을 버틴게 정말...장하다고..쿨럭..
Commented by teajelly at 2006/07/12 15:01
처음 뵙겠습니다. 이오공감에서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로긴했어요. 다행히 저는 런던에서 1년 정도밖에 살지 않아서 그럭저럭 아스다의 백색상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초반에도 도저히 그 하얗고 녹색 포장의 치약과 비누만은 도저히 쓸 수가 없더라구요. ^^ 몇년이 지난 지금은 그것도 그립네요. 80p짜리 복숭아 통조림 맛있었는데... 덕분에 오래간만에 학생시절 추억을 되새겼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Frozenblue at 2006/07/12 16:24
이오공감 타고 왔습니다.
취향을 하향조정하려면 당분간 아예 접촉하지 않는 기간을 가지는 게 제일 좋긴 한데, 힘들죠. 다만 군대에 가게 되면 대부분의 취향 패러미터가 최저점으로 리셋되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지요. :P
Commented by 은혈의륜 at 2006/07/12 19:03
벽의 반정도의 길이를 가진 영수증 가히 상상이 안가는 길이의 캐압박입니다. 무섭군요. 근데 그래서 합계 얼마였나요?
Commented by 파인애플 at 2006/07/12 20:32
런던 생활에서, Sainsbury는 식비를 줄여주는 고마운 친구;; 글 보고 좋은 추억 되새겼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guest at 2006/07/12 23:23
이오공감 타고 왔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고급취향으로의 상승은 쉬워도 저질로 다시 내려가기는 비참하다' 정말 공감!!^^
Commented by luxferre at 2006/07/13 00:50
이오공감축하드립니다. 뒤져보면 세인즈버리 포인트 카드 아직 있을텐데--;
가끔 이코노미 제품과 비싼 정품(?)사이에서 갈등하던 생각이 나네요.
홍차 많이 드시고 오세요. 마시던 위타드를 들고왔는데도 영국서 마시던 맛이 안나더라구요.
Commented by haarie at 2006/07/13 00:58
깜짝! 확 늘어난 방문자수에 덧글까지, 내 블로그 맞나 순간 놀랐습니다. 이오공감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초보 블로거를 이리 방문해 주셔 감사~ 그나저나 수퍼마켓 얘기에 공감하시는 분이 많았군요! 저는 아직도 질보다는 가짓수 주의자라.... 영수증이 아무리 길어도 "생각보다는" 총액이 크지 않다는....-.-;;;
Commented by Hibiki at 2006/07/13 01:54
안녕하세요, 이오공감으로 들어왔습니다. 교환학생으로 약 반 년 정도 있어봐서 왠지 너무나도 공감가는 글이라서 그냥 한 마디 씁니다(^^;). ..그게 저도 홍차는 거의 마시지도 않았는데...몰에서 그냥 한 번사온 위타드 홍차 맛에 반했거든요.^^
Commented by haarie at 2006/07/13 10:34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돌아가도 홍차를 마시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Commented at 2006/10/30 04: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haarie at 2006/10/31 20:44
이글루스에서 하는 것 같은데, 블로그들 중에서 몇 개씩 뽑아 추천글 리스트에 올려놓는 곳인가봐. 나도 몰랐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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